KBS '역사저널 그날'이 다룬 '이인좌의 난'이 좀 이상하다 경패

1728년 무신(戊申)년의 란, 즉 이인좌의 난은 영남 7만, 전국 20만, 전국적으로 조직된 대규모 반란이다. 난의 주축은 '남인'으로, 경상도에 기반을 둔 붕당이었다. 이인좌는 충청도 출신이나 조선은 당색에 따라 진영이 갈라지는 시대였기에 지역에 상관없이 남인이면 같은 진영이다. 당시 남인은 중앙 정계 진출이 막혀 있었는데, 이인좌와 정희량 역시 남인 출신이었기에 관직에 나가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의 정국은 '노론'이 주도하고 '소론'은 위태롭고 '남인'은 퇴출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론과 남인이 편을 먹고 반란을 준비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조가 탕평책을 통해 노론을 억제하고 소론을 등용하자 소론은 분열되었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왕+노론+소론일부(완소)] VS. [남인+소론일부(급소)]

영조는 이렇게 소론을 분열시킨 후 더 나아가 소론인 오명항을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했다. 이렇게 소론이 분열되니 결국 남인이 주축이 된 것이다.

방송은 전라도의 반란 준비에 대해 '현감과 부사는 요즘으로 따지면 군수정도 되는 건데, 저런 지방 공직자까지 반란에 가담한 것은 더 나라를 위태롭게 했을 것이다.'라며 담양 화약고에 불이 난 것처럼 속여 화약을 빼돌린 사건을 전했다.

충청 이인좌에 대해선 개인의 사재를 털어 말과 군복을 사는 등 반란을 준비했으며, 반란을 위해서 좋아하던 술조차 8년간 끊었다는 일화를 전했다.

경상도 정희량에 대해서는 사재를 털어 군사를 모집했으며, 돌을 은으로 속이는 사기를 쳐 깃발을 만들 비단을 준비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얼핏 전라도의 반란 준비는 공직자가 조직적으로 했기에 더 나라를 위태롭게 했을 것 같고 경상도의 반란 준비는 사기나 치는 비정상적인 개인이 한 것이니 나라를 덜 위태롭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인좌의 난에서 전라도 역할은 미미했고, 주축은 남인, 그 중에서도 경상도였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있는 내용이나 그 양이 방대하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신란은 전국 규모의 반란이었다. 호서, 호남, 영남 지역은 물론이고 경기, 평안도까지 반란군이 결성되어 있었다. 반란을 이끈 삼두마차는 호서의 이인좌, 호남의 박필현, 그리고 영남의 정희량이었다.

...정희량은 이응보와 함께 3월 13일 안동에서 거사하기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고향인 안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불과 며칠 만에 안음, 거창, 합천 등 경상도의 지역을 쉽게 장악한 반란군들은 여세를 몰아 북진을 재촉했다. 그 사이 병력도 7만의 대군으로 불어났다. 호남의 거병을 주도하기로 한 박필현은 근왕의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와 합세하기로 한 전라감사의 비협조 속에서 결국은 허무하게 도주하고 말았다.

...정희량은 이인좌의 아우 이응보와 더불어 영남의 총책임자로서, 순흥, 안동, 안음 등 경상도 주요 지역을 왕래하며 영남 지방 사족의 포섭에 주력했고, 이인좌가 거병을 한 후 가장 적극적으로 봉기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 대구사학회,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pp.276-279 )


방송 내용과 역사적 사실 사이에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뭔가 관점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방송이 진행될수록 이상한 점이 점점 더 늘어나고 분명해진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이인좌의 난이 남긴 가장 큰 변화는 경상도(남인)의 완전한 퇴출이다. 이 이후로 경상도는 경상좌도, 경상우도를 막론하고 중앙 정계 진출이 거의 완전히 막혔다. 토벌한 남의 나라처럼 경상도를 대하는 '영남평정비'가 대구에 세워질 정도였고 이런 경상도에 대한 배제는 고종까지도 이어졌다.

"거경자(居京者)로서 3세대 이상 각 세대마다 당상관을 1인 이상 배출한 가문"인 벌열의 비율을 보면 인조반정과 이인좌의 난으로 인한 남인의 몰락을 잘 알 수 있다:
인조~경종 시기: 서인 71%, 남인 17%, 북인 12%,
영조~정조 시기: 노론계 79%, 소론계 13%, 남인계3%, 북인계5%,
순조~고종 시기: 노론계 77%, 소론계 14%, 북인계 6%, 남인계 1%.

(차장섭, 조선후기벌열연구, 일조각, 1997, 269쪽.)


그런데 방송의 이인좌의 난의 결과로 혁파되거나 강등된 지역을 보면 "전라도"의 강등은 눈에 확 들어오나 "경상도"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경상도인 예천 풍기, 충청도인 청주 등도 읍호가 강등됐으나 언급이 없다.

게다가 박필현의 봉기 지역인 전라도 태인이 강등되지 않은 이유는 그 지역이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굳이 지적하며 강등당해 마땅한 전라도 지역이 더 있음을 내비치고 있으나, 강등되어 마땅함에도 여러 정치적 고려 때문에 강등되지 않은 경상도 합천에 대해선 역시 언급이 없다.

심지어 정희량의 거점으로 혁파된 안음은 경상도인데 마치 전라도인양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건 좀 이상하다. 전라도를 반역향(배반의 고장)이라고 주장하는 일베충 등에게 이인좌의 난은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 중 하나다. 실제 역사에서는 반역향으로 찍혀 중앙정계 진출이 철저하게 제한된 지역은 경상도이고 이인좌의 난은 이런 경상도 배제를 확정시킨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송은 이 이인좌의 난을 다루며 마치 전라도가 난의 중추이며 반역향인양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방송 초반부터 반란의 주축으로 이인좌와 정희량이 속한 남인이 아니라 소론을 먼저 거론하고 강조한 것도 새삼 신경쓰인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써오던 '이인좌의 난'을 고려의 '무신난(武臣亂)'과 혼동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무신난(戊申亂)'이라고 재명명한 것도 뭔가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인좌의 대표성이 사라지면 남인의 대표성도 사라지고 남인의 지역적 기반인 경상도의 대표성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경상도에 덧씌워진 반역향으로서의 색채가 옅어지는 것이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듯이 실수가 반복되면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의도가 없다면 이런 식의 방향성이 있는 왜곡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진행자인 신명주 교수는 안동, 류근 시인은 문경으로 둘 다 경상도 출신이다. 이 두 명은 역사저널 그날의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공식 진행자이다. 나머지 세명은 가변적인 패널이거나 게스트일 뿐이고.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 경상도 출신들이 똘똘 뭉쳐 역사를 왜곡하고 전라도 차별을 선동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싶지는 않다. 다만 지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방송은 좀 이상한 방송이라는 지적은 꼭 하고 싶다.


덧글

  • 零丁洋 2015/01/11 23:18 # 답글

    뒷 부분을 못봐서 이렇게 방송이 전개되는 줄 몰랐습니다. 무신란을 일명 영남란이라고 칭할 정도로 영남이 주축이었고 충청도는 이름까지 공청도가 되었는데 위에 지도를 보면 반란의 중심지가 전라도 처럼 보입니다. 역사를 아는 분들이기에 단순한 실수 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 ㅋㅋ 2015/01/12 06:26 # 삭제 답글

    기승전 경상도 경상도 독립 청원은 언제내러가실거죠?
  • 루나루아 2015/01/12 17:44 # 답글

    쩝..씁쓸하네요. 그런데 쓰신 부분에 오류가 없잖아 있는 듯 합니다.
    고종까지 이어지는 경상도 ... 은 맞는 것으로 알고 있긴 하지만, 그 뒷면에는 경북 세도가들의 입김이 있어 엄밀히 말해 지역적으로는 (현)경상북도는 해당이 없는게 아닌가 싶군요.
  • 계현동 2015/01/12 20:07 # 삭제 답글

    역사저널 홈페이지에 정식으로 문제제기 해주시는건 어떠신가요?
    하고자 해도 역사적 사실을 잘 몰라서 못하겠네요.
    의도적인 편집이던 아니던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 피해의식 2015/01/15 07:45 # 삭제 답글

    니들이 그래서 경상도보다 못한거다 피해의식 덩어리들아
  • 눈꽃지기 2015/01/16 14:21 # 삭제 답글

    오죽하면 국사학계에 경상도 역사왜곡이 심해서 경상도사관이란 비아냥까지 있겠습니까. 일제식민사관은 경상도사관에 비하면 양반이란 말까지 있음
  • 아르마다 2015/01/21 09:40 # 삭제 답글

    저도 방송을 보고, 좀 의아한 부분이었는대 잘 지적해주셨네요~~ 두 패널의 출신지역이 안동과 문경이다보니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가 가장 중점을 둔게 경상도남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감과 배척인대, 가장 상징적인 "평영남비"에 대한 언급이 한 글자도 없었다는 건 현 정권에 대한 눈치보기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에요~~ 그리고, 지도 중 태인과 담양의 위치가 바뀌었고, 이는 전체적으로 다큐수준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 지나는이 2016/04/11 23:31 # 삭제

    눈치를 보면서 방송을 할 정도면 아예 만들지도 않았겠죠
    하여간에 자기들 맘에 안들면 전부 의혹투성이지
  • 사필귀정 2015/02/10 23:14 # 삭제 답글

    담양이 태인보다 위로 나온 그림이 계속 뜨더군요
    역시 PD는 전라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더군요 아니,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겠지요 저만해도 전국 군단위의 위치는 대충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역사저널 그날에 초대된 패널들을 보면 유독 경상도 말씨가 많습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PD가 골수 경상도 지역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아니기를 바랄뿐입니다.
  • 바른 2015/02/16 11:18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글을 링크해주신 어떤 분 덕분에 이렇게 찾아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역사에 대해 지식이 부족해 지적해주셨던 부분에 대해서도 그전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네요. 그렇다 보니 방송을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어 기쁘네요.
    실례가 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글 작성자 분께 제대로 된 사관에 의해 기술되어
    출판된 도서자료 추천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역사에 관심은 있지만 지식은 없고... 암튼 시작이 중요할 것 같아 도움을 받고 싶네요.
    꼭 부탁드릴게요.
  • 대구공산폭동 통궈 2015/02/28 17:37 # 삭제 답글

    조선시대의 지역별 반역 횟수 깽상도 - 12회, 전라도 4회. 영조가 느닷없이 머구에 영남평정비를 세운게 아니라는 말씀이지.
  • 잔디나무 2015/03/17 11:02 # 삭제 답글

    사실과 다른 점을 요약하시는데요.
    실제로 난을 일으킨 이인좌의 반란군과 전투는 안성과 죽산에서 이루어집니다. 반란군의 주력은 호남과 충청이었구요. 1차적으로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후 영남지방으로 이동해서 토벌하려고 죽령을 넘어갑니다. 이때 매복을 두려워해서 기병100명을 먼저 앞세워 죽령을 넘어갑니다만 매복은 없었고 영남으로 관군이 진입했을시에 저항은 없었습니다.그만큼 인명피해도 없었고, 경상감영에서 반란군을 잡아들이고 평정비를 세운겁니다.
    여기서 또 억지 주장이 나오는데요. 영남인을 등용하지 않았다? 평정에 들어간 분무공신 권희학의 후손들이 그이후 경상감영의 이속을 거의 차지하고 벼슬에 오릅니다. 저는 권희학의 후손이고, 우리집안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무신란에대해 공부했습니다만,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이렇게 이용되는걸 보니 웃음이 나와 글을 남깁니다.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지역감정 조장하기 기분들이 좋으신가요? 전라도가 배제당했던건 안타까우나 똑같이 지랄들 하는걸보니 토가 나옵니다.
  • 지나가다 2015/03/19 15:19 # 삭제

    진짜 어떻게 이렇게 두눈 시퍼렇게 뜨고 거짓말을 하는지 알수가 없네요.

    반란군의 주도세력이 호남과 충청이었다구요?

    이인좌는 충청인이니 초반에 충청세력이 청주성을 점령한뒤 서울로 올라가다 안성에서 패하고 결국 죽었지요.

    호남군이요? 호남군은 시작도 하기전에 전라도 관찰사 정사효(한성 출신)가 배신해서 제대로 봉기도 해보지 못하고 붕괴되었는데 호남이 주력군이요?

    어디서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합니까?

    그러면 남은 건? 바로 정회량의 경상도 반란군.

    다른 지방이 무너지는 와중에서도 최후까지 버티면서 거창, 합천 등을 점령했지만 결국 안동, 상주에서 저지되고 정회량은 거제에서 잡힘.

    이인좌의 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제일 많은 고을을 점령하고 제일 오래 버틴건 경상도의 정희량입니다.

    괜히 대구 입구에다 평영남비 비석을 박은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중앙정계 진출이 제한을 받았다고 써있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써 있지 않습니다. 중앙정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름?
  • 팔도강산 2016/06/06 17:01 # 삭제

    이렇게 뻔뻔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분도 있군요.
    지나가다님이 댓글 없었으면 속는 사람 많을겁니다
    경상도 사람같은데 왜저러고 사는지 ㅉㅉ
  • 역사저널 2015/03/28 14:34 # 삭제 답글

    역사저널이란 프로 문제가 많습니다
    패널이나 등장인물 대부분 경상도 인물이며
    경상도 인물 띄우기위한 프로로 보이더군요.

    경상도 출신 인물들 중 호감가는 인물은 우상화 시키고 반역자나 싸이코로 몰리는 인물들은 명예회복을 추구하더군요.
    신돈이나 궁예까지는 이해가 간다고 쳐 주겠습니다.

    다음주엔 이의민을 다룬답니다.
    이의민이란 경주출신 망나니 반역자에게 귀중한 공중파 40분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지..

  • 한심해서 2016/03/12 00:50 # 삭제 답글

    이인좌의 난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여기서까지 지역감정 섞인 글은 보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인좌의 난은 그 본질이 노론을 상대로 소론과 남인이 대항한 것이다. 즉 서울 경기지역을 상대로 충청, 경상, 전라도지역이 대항한 것으로서 노론이 승리한 역사이다. 따라서 이인좌의 난은 승리자인 노론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지역감정을 구태여 나타내자면 충청, 경상, 전라지방이 서울에 대해 나타내야 함에도 밑의 댓글을 보니 오히려 당시 같은 편이었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지금은 서로 헐뜯으려고 하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 지나가던 사람 2016/03/30 16:18 # 삭제 답글

    그 제가 일베충은 아닌데 느닷없이 일베충은 왜 나왔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는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 됩니다.
  • 아일 2016/06/08 09:29 # 삭제 답글

    지도가 매우 왜곡적이네요. 게다가 전라도만 보라색으로 색칠하고 강등 ㅋ

    마치 무슨 반란의 고장인양 묘사한게 웃긴듯.. 역사저널 본적은 없지만 만약 실제로 평영감비 언급 한번 안했다면 명백한 왜곡 방송이지요. 저 사건이후 영남 출신들은 철저하게 권력에서 배제 됩니다.
  • 흐미 2016/11/22 12:00 # 삭제 답글

    근데, 고정 패널인 류근 시인이 경북 문경출신이라고 본문에 잘못 적으셨는데, 충북 충주 출신이십니다. 충주와 문경세재가 가깝다보니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군요. 

    또, 기록을 보면 영조 때 무신란으로 퇴출된 건 남인과 소론 강경파인 준론이고, 남인의 다수가 영남 출신이었던 것 뿐입니다. 즉, 지역보다는 당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입니다.

    중앙 정계에서 영남 출신은 이미 서울에 자리잡은 이들(노론)이 주도했고, 나머지 영남 특히 안동 지역 남인들은 정조 이후 노론의 구애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남인으로 남았기 때문에 중앙정계의 관직에서 배제된 것 뿐이죠.

    또 한편으로 이미 숙종 때 세 번의 환국의 결과로 극심한 피해를 경험했던 남인들이 중앙정계에 환멸을 느껴 대부분 낙향했고, 그 이후 흥선대원군 때 복권될 때까지 남인들이 스스로 정계에 진출을 꺼리게 된 탓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신란은 경기지역의 소론인 이유익이 총기획자였고, 호남지역에서 시작된 잇다른 괘서 사건으로 호남지역의 소론세력이 반란의 시작이자 총본산였던 것도 맞습니다.

    다만 영조가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인 완론을 중용하고 노론을 배척하자 막상 군사작전에선 호남 반란파 내부의 배신으로 스스로 와해됐을 뿐이었죠.

    충청도의 이인좌가 청주 점령 등 사실상 가장 인상적인 공세를 펼치지만 경기도 전투에서 오영명에 패하고 능지처참당합니다.

    경상도의 정희량은 조선시대 안음현에 속했던 안의에서 거병해 거창, 합천 등을 아우르며 가장 오래 버텼기 때문에 영조와 노론 세력에 미운털이 박혔던 것 뿐입니다.

    그리고 '안음현'이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보인 까닭은 아마 정희량의 본거지인 '안의'가 전라도와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하게는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이죠.

    지역감정이란 렌즈를 통해 역사적 사건를 바라보는 건 왜곡되고 편향된 결론을 도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흐미 2016/11/22 12:27 # 삭제 답글

    한마디 덧붙이면 역사저널 패널 중 경상도 출신은 신병주교수 뿐입니다. 나머지 패널은 서울과 충청도 출신이며, 다른 게스트 패널로 출연하시는 분들 중엔 호남출신도 많습니다.

    제 생각으론 전체적으로 상당히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줍니다. 정여립의 난을 다룬 기축옥사 편을 보시면 제 말에 동의하실 거예요. (보시면 전라도라는 관점은 전혀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정희량의 잔당들이 토벌된 후 대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웠다는 평영남비에 대한 언급도 무신란 편 방송에서 생략한 것으로 보입니다.)
  • ㅇㅇㅇ 2016/12/29 19:31 # 삭제 답글

    원래 한국 역사 방송에서 신라 엄청 띄우고 영남 지역 선비의 고장으로 묘사합니다. 권력이 방송도 그렇게 만든거죠. 영남 평정비 하나 언급 안하는 이인좌의 난 ㅋ
  • ㅁㄴㄹㅇ 2018/02/17 00:44 # 삭제 답글

    저 방송 비롯해서 한국 방송 대부분 최근 영남 권력 세력 눈치보느라 신라 엄청 띄우고 그랬죠. 오죽하면 멕시코 천년 한류 비밀이라면서 멕시코인이 신라인 후손이라는 미친 다큐 까지 만들었겠습니까? 영남 권력 세력은 보수 진보 할것없이 유사역사학자들이 신라와 함께 미쳐 날뛰는데 세계에 아주 개망신을 다 하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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